중학교 도덕 시간에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말을 처음 배우고 나서는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는 내가 안다고 말할 만한 주제에 대하여는 나름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일단 무엇에 대하여 안다고 말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반대로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행동을 하기에 상당히 많은 공부를 해야하는 사항에 대하여는 외면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어설프게 단면을 알고 재단하여 이야기하기 보다는, 제대로 알고나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다보니, 업(業)이 삶과 행동의 대부분이 되었고, 그 외에 대하여는 일자무식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삶은 단순했다.
그런데 최근 한 10년 좀 안 되는 기간 동안, 사업을 하며 이래저래 여러 정치인을 만나게 될 기회가 있었고,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미국 대선, 한국 대선, 또 최근에 미국과 한국에서 다시금 조명되고 있는 정치적 사안들을 보며 생각이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사업과 가족, 그리고 가끔의 친구 관계라는 비교적 단순해 왔던 삶에 생각할 차원이 하나 더 늘어난 샘이다.
정치라는 단어는 내 삶에 영향을 그 동안 직, 간접적으로 주고 있어 왔지만, 내가 다시 되먹임(feedback)을 함에 있어서는 분명 소홀히 해왔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는 범주 내에서의 법을 지키고자 하고, 윤리라는 것에 대하여 실행하려고 하고, 쓰레기 버리지 않고, 세금을 잘 내고, 앞의 전제를 잘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응원하고, 투표를 하는 정도가 나로서의 국민의 의무를 다함의 정의였다.
삶 자체를 단순하게 하려다보니, 무언가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면, 왈가왈부(曰可曰否)할 것이 아니라 지행합일에 따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프랙탈(fractal)한 관점을 따라, 우선 스스로를 먼저 가다듬고, 그리고 나서 가족과 내가 속한 회사는 책임질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나라와 인류의 안녕을 논하고 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나는 스스로 조차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를 논하기에는 아직 수준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 정치적 이슈를 살펴보면 정확한 사실 관계 확인을 제대로 하기 힘들기에 내가 어느 선을 사실이라고 이해하고, 어느 선까지 행동을 해야하는 지 판가름 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소셜 미디어에서는 손쉽게 공유되는 것들, 그리고 소위 언론의 기사들 또한 정확한 사실이 아닌 경우가 그동안 너무 많았기에 기사 한 두가지에 좋아요를 누른 다거나 공유를 해가며 공분을 하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씌운 국민의 의무의 범주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선동적인 글이 아닌 담담한, 저널리즘의 본연에 충실한 글을 찾기가 그리 쉬운 편은 아니라서 기사를 읽어가며 감정적 영향을 배제하고 객관적 판단을 하기도 어렵다. 뭘 제대로 알아야 판단을 하겠는데, 특히 정부와 정치라는 고차원적인 사회적 활동에서의 사건과 인물의 파편 만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답답한 감이 있다. 분명히 생각하게 된 것은 ‘무언가 많은 것들이 오랫동안 잘못되어 왔다’라는 인식 정도일 것이다.
“Great minds discuss ideas; average minds discuss events; small minds discuss people.”
소설을 넘어설 법한 화려한 사건과 인물의 향연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보자면, 나는 인류와 문화의 발전에 수렴(convergence)과 발산(divergence)의 사이의 진동에서 오는 균형이 가져다주는 효과를 믿는데, 한국은 문화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수렴의 힘만이 너무 강한 국가에 속한다. 비교와 경쟁이 성공과 행복의 척도가 되고, 그러다보니 오로지 내 위에 있는 사람의 말만 잘 들어도 되는 지극히 하향적(top-down) 사회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건강해지기 위하여는 다양성을 높일 필요가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참여자의 수를 높이는 것이다. 역시나 어설프게 알기에 조심스러운, 민주주의의 효과성의 원천은 다양성의 독립적 참여로부터 비롯된다. 소위 말하는 대중의 지혜(wisdom of the crowds)처럼, 각자가 어느 정도의 사실을 비롯으로 한 제한적 합리성내에서 informed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각자가 최대한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참여를 할 때 민주주의가 나름의 최적해를 찾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의 한국은 분명 그러하지 못하다.
사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또한 같은 문제로 고생을 하고 있다. 해당 국가라는 환경과 시민권이라는 속박 속에서의 장기적 영향이 가장 클 법한 젊은 층이 투표율이 높지 않다. 그러다보니 다양성이 부족하여,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의 축적 속에서 수렴이 이루어진, 이제는 고착화된 의견들이 민주주의의 방향에 주된 영향을 주는 상황이 되었다.
자연에서 이미 수억년에 해당하는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볼 수 있듯, 수렴하는 힘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발산하는 힘을 함께 부여하는 것인데, 이를 위하여는 참여의 증가를 통한 다양성의 확보와 같은 다소 점진적인 방법이 있고, 지각 변동에 해당할법한 극단적 동요(perturbation)을 주는 방법도 있다. 물론 그 사이에는 다양한 단계들이 분포하겠지만, 전자는 비유하자면 투표이고 후자는 전쟁/민란/쿠데타 같은게 그에 해당 될 것이다.
단순한 형태(1인 1표)의 참여가 가져오는 민주주의가 갖는 한계 중 하나는 이러한 시스템은 이미 방향이 정해진 상황에서의 최적화(optimization)의 문제를 푸는데 효과적이긴 하나, 전역 최적해(global optimum)를 찾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이라는 문제 공간이 기술의 진보, 자연 환경의 변화 등으로 지속적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어느 정도 수렴된 문화속에서 나온 해법에 대하여 최적화를 위한 표를 모으는 것이 갖고 있는 한계는 비교적 명확하다.
사실 이미 사회가 나름의 초유기체로서 오랜 세월 진화를 해오는 과정에서 스스로 갖추게 된 문화라는 이름의 적합성 함수(fitness function)가 버젓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할만큼 강력한 상향식(bottom-up) 혁신은 지역 최적해(local optimum)로부터 벗어날만큼 충분한 동요를 만들어내기는 힘들 수 있다.
순수히 평화로운 방법(예: 투표)으로 기존의 고착화된 체계를 근본적으로 흔든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전제 하에서는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사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육성할 수 있는 다양성과 창의성 속에서, 나름의 고민과 논의를 통하여 전역해에 근접한 답을 가진 사람이 리더로서 부상하고, 이를 민주주의가 뒷받침하여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면 스스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것이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작금의 시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삼권분립이 제대로 되어있는 가와, 과연 기존의 강력한 수렴의 힘이 빚어낸 현재의 사회 및 정치 시스템에 대한 국민들의 회의가 있는 상황이어서 이러한 전제 자체가 과연 성립될 수 있는 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 생겼다는 점일 것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보면 희극”
지금 바다 건너에서 일을 하며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실로 이러하다. 나라에 존경받을 만한 어르신이 없다고 느껴지는, 혹은 어딘가에 숨어있는데 온 나라가 안개속과 같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이 상황에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국가에 속한 개개인이 느끼게 된 좌절감과 상실감은 다시금 거대한 감정의 물결이 되어 국가라는 기틀을 흔들 만큼 소속감과 자부심을 흐트러뜨려 놓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공천과 같은 상당히 강력한 적합성 함수가 하향식으로 힘을 미치는 환경에서, 전역 최적해를 제시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민주주의의 힘을 받아 상향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과연 환경적으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 또한 있다.
나는 정치 전문가도 아니고,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흐름을 안다고 할 정도의 자격은 없지만, 국가라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지금의 경험을 반드시 기억하고, 감정적 반응과 격분이 아닌, 지금의 위기로 부터 교훈을 얻고, 근본적인 국가적, 문화적 “가치(values)”로 정립하여 장기적인 방향성과 나름의 국가에 대한 관점, 개개인의 철학을 세울 만한 좋은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아울러 중장기적으로 우리 나라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망가진 부분들을 재건할 기회를 만들만큼의 충분한 동요와 다양성을 포용할 만한 환경이다. 국민적 다양성의 증대를 돕기 위한 정책 및 제도, 저문맥 사회로 무게중심을 이동시켜 개개인의 독립성을 높이고, 젊은 층에서 산업전반에 걸친 새로운 리더십의 폭넓은 등장 및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말한다. “Don’t boo. Vote.”
단기적 야유와 분노가 아닌, 국가와 인류의 중장기적 목표에 대한 담담한 고민과 행동이 필요한 시기인 듯 하다. 국민이라면 모두 잊지 말고 투표하자.